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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잠실야구장, 불펜에서 마운드로 향하는 한 투수가 있었다.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리는 장발과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강속구, 그리고 마운드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역동적인 모습. 그는 LG 트윈스의 상징이자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좌완 파이어볼러 '야생마' 이상훈이다. 1993년 프로야구 사상 최고액인 2억 원의 계약금으로 LG에 입단한 그는 1994년과 1995년 2년 연속 다승왕을 차지하며 LG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이 되었다. 비록 짧은 현역 생활이었지만, 그가 마운드에서 보여준 열정과 카리스마는 세대를 넘어 많은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전설의 시작, 1994-1995 LG 황금기의 에이스
이상훈의 전성기는 프로 2년차였던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8승 8패, 평균자책점 2.47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해태 조계현과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완봉 2차례를 포함해 6차례의 완투승을 기록하며 LG의 정규시즌 1위를 이끌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1차전과 4차전 선발로 나서 팀의 2번째 우승을 견인했다.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 철학 아래 확고한 선발 로테이션이 구축되었고, 이상훈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이듬해인 1995년, 이상훈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세웠다.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국내 좌완 선발 20승 투수가 된 것이다. 시즌 중반까지 리그를 압도하는 페이스를 보이던 그는 선발진의 부상으로 3일 휴식 로테이션이라는 강행군을 치르면서도 마지막 등판에서 쌍방울을 상대로 간신히 20승을 달성했다. 9회에도 교체를 거부하며 완투를 고집했던 그의 승부욕은 전설이 되었다. 비록 MVP는 김상호에게 돌아갔지만, 그해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으며 90년대 최고의 좌완투수로 자리매김했다.
휘날리는 갈기, 장발의 아이콘
이상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바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장발이다. 당시 보수적인 스포츠 문화에서 프로야구 선수의 장발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의 긴 머리는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과 개성을 상징했고, 팬들은 그를 '야생마', '삼손'이라 불렀다. 역동적인 투구폼과 함께 휘날리는 장발은 마운드 위에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흥미롭게도 이상훈이 프로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머리를 짧게 자른 순간이 있었다. 1996년, LG가 하위권으로 처지고 이상훈 자신도 척추 분리증으로 부상을 당했을 때였다. 병문안을 온 이광환 감독이 팀 분위기 쇄신을 위해 머리를 정돈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이광환 감독이 고위층의 압력으로 경질되자, 이상훈은 존경하던 첫 프로 감독이 물러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리로 머리를 자르고 나타났다. 이후 그는 은퇴할 때까지 다시는 장발을 자르지 않았다. 심지어 2002년 국내 복귀 당시 김성근 감독도 처음에는 머리를 정돈할 것을 지시했으나, 이상훈의 장발이 가진 의미와 성실한 훈련 태도를 보고 장발을 인정했을 정도였다.
한·미·일 3개국 리그 경험으로 야구 인생의 굴곡
1997년 구원왕에 오른 이상훈은 1998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건너갔다. 당시 등록명은 그의 별명을 딴 '삼손 리(Samson Lee)'였고, 이종범, 선동열과 함께 일본 야구계에 한국 선수들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1995년 한일 슈퍼게임에서 일본 프로야구 올스타 팀을 상대로 12이닝 1실점이라는 압도적인 투구를 선보였던 그는 일본 무대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1999년에는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로 진출해 마이너리그에서 주로 활동했고, 메이저리그에 9경기 등판했다. 비록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한국, 일본, 미국 3개국의 최상위 프로야구 리그를 모두 경험한 최초의 한국 선수라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2002년 4월, 방출된 그는 김성근 감독의 부름을 받아 LG로 복귀했다. 복귀 이후 21경기 무패행진을 펼치며 25세이브포인트를 기록했고, 하위권에 맴돌던 LG를 중위권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9회말, 이승엽에게 3점 동점 홈런을 맞고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삼성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헌납한 아픔도 남겼다.
야구를 떠나 다시 야구로, 음악과 지도자의 길
2004년, 이순철 신임 감독과의 '기타 파동'으로 이상훈은 LG를 떠나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라커룸에서 기타를 치는 것을 두고 벌어진 갈등이었는데, 당시에는 서로 간의 오해와 잘못된 소통이 문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SK에서 2군으로 추락한 그는 잔여 연봉 3억 원을 포기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그는 록밴드 '왓(What)'을 결성해 보컬로 활동하며 음악에 몰두했다. 야구와 완전히 결별한 듯 보였던 그의 변신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2012년, 은사인 김성근 감독의 부름에 이상훈은 다시 야구계로 돌아왔다. 고양 원더스 투수코치로 8년 만에 복귀한 그는 이후 두산 베어스(2015년), LG 트윈스(2016-2018년)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 특히 LG 복귀 당시 구단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피칭아카데미를 신설했고, 코치로서는 이례적으로 유니폼 판매 3위를 기록할 정도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임찬규 등 많은 젊은 투수들이 그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 2019년부터는 MBC 스포츠플러스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와 현장 경험을 살린 분석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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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은 통산 71승 40패 98세이브, 평균자책점 2.56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숫자만 보면 화려하지 않을 수 있지만, LG에서 활약한 7년은 그 어떤 선수보다 강렬했다.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 국내 유일 좌완 20승 투수, 그리고 한·미·일 3개국 리그를 모두 경험한 선구자. 무엇보다 마운드 위에서 휘날리던 장발과 카리스마 넘치는 투구는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2023년 LG가 29년 만에 우승했을 때, 이상훈은 "이제 1994년의 기억은 추억의 책장 안으로 들어가도 좋을 것"이라며 새로운 사랑을 응원했다. 하지만 LG 팬들에게 야생마 이상훈은 여전히 특별한 존재다. 그가 47번을 달고 마운드에서 보여준 열정과 승부욕,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은 세대를 넘어 한국 프로야구의 소중한 유산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Top 40 중 27위, 그 자리에 이상훈이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남긴 강렬한 인상과 상징성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