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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KBO 홈페이지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다. 바로 백인천(1942년생)이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에 기록한 타율 0.412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KBO 리그 역대 최고 타율 기록이자,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4할 타자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 한국 야구가 프로의 세계로 첫 발을 내딛던 순간의 상징이자, 진정한 프로 야구인의 면모를 보여준 전설적인 순간이었다.

    1942년 중국 장쑤성에서 태어나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온 백인천은 경동고 시절 '원자탄 투수' 이재환과 배터리를 이루며 고교야구 최강팀을 이끌었다. 그리고 일본 프로야구에서 1962년부터 1981년까지 약 20년간 활약하며 1975년에는 타격왕(.319)을 차지하는 등 해외 무대에서도 빼어난 실력을 인정받았다.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만 3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원년부터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하며 한국 야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Top 40 중 24위에 선정된 백인천의 위업을 조명해본다.

    역대 유일 4할 타자, 불멸의 기록

    전 세계 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는 꿈의 기록으로 불리며, 1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MLB에서는 단 24차례만 나왔고, 89년 역사의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백인천의 4할 타율은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1982년 프로 원년, MBC 청룡의 감독 겸 선수로 뛴 백인천은 250타수 103안타로 타율 0.412를 기록했으며, 2위 윤동균(OB베어스)의 0.342와 7푼이나 차이가 났다. 당시 72경기를 출장한 백인천은 20년 가까이 일본 프로야구를 경험한 그와 아직 실업의 티를 벗지 못한 다른 선수들 사이에는 현격한 수준 차가 존재했다. 일본에서 익힌 선진 야구 기술과 프로로서의 마인드가 그대로 적중한 결과였다.

    이후 1994년 이종범이 104경기까지 4할 타율을 유지하며 최종 0.393으로 시즌을 마쳤고, 2012년 김태균이 89경기까지 4할을 유지하다가 0.363으로 마무리하는 등 여러 타자들이 도전했지만, 43년이 지난 현재까지 백인천의 4할 1푼 2리를 넘어서는 타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경기 수가 적었던 시대의 기록이라는 평가를 넘어, 시대를 초월한 압도적 기량의 증거로 평가받는다.

    일본 프로야구 20년, 선구자의 여정

    백인천의 진정한 위대함은 4할 타율 이전의 여정에서 찾을 수 있다.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입단하여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 첫 발을 내딛은 그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선구자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이 일본에서 프로 선수로 활동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975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로 이적한 백인천은 히가시오 오사무, 도이 마사히로 등과 함께 팀의 간판으로 활약하며 타율 0.319로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차지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해 라이온즈가 타격왕 백인천, 홈런왕 도이 마사히로, 다승왕 히가시오 오사무를 배출했음에도 팀 순위는 꼴찌였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뛰어난 기량이 반드시 팀 성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남긴 시즌이기도 했다.

    일본 프로야구 통산 1,969경기에 출장하여 1,831안타, 209홈런, 212도루를 기록한 백인천은 꾸준함의 대명사였다. 특히 20-20 클럽을 단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통산 200홈런 200도루를 기록했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오랜 기간 안정적인 기량을 유지했는지를 보여준다. 장타력과 교타 능력, 주루 기술을 두루 갖춘 만능형 타자였던 셈이다.

    지도자로서의 빛과 그림자

    현역 은퇴 후 백인천은 지도자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990년 LG 트윈스 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만년 하위권이던 팀을 단 1년 만에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으로 이끌었다. MBC 청룡 시절부터 뛰던 김재박, 이광은, 김상훈, 김용수 등이 주축이 되어 청룡 시절의 한을 풀어내는 우승이었다. MBC의 초대이자 마지막 감독, 그리고 LG의 창단 감독으로서 서울 구단 최초의 우승을 이끈 것은 그의 지도자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1995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한 백인천은 비록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야수진의 전면적인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단행하여 이후 삼성이 최강 팀으로 군림하게 된 기초를 마련했다. 특히 투수였던 이승엽을 타자로 전향시키고 외다리 타법을 전수하여 아시아 최고의 홈런 타자로 키워낸 것은 한국 야구사에 길이 남을 혜안이었다. "백인천이 롯데 이후에도 야구로 먹고사는 것의 8할은 이승엽 덕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이승엽 발굴은 백인천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2002년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은 그의 커리어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구단과의 갈등 속에서 사실상 태업을 하며 팀을 꼴찌로 만들었고, 이는 그의 전반적인 평가를 크게 떨어뜨리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롯데 시절의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LG 우승과 이승엽 발굴이라는 빛나는 업적들이 상대적으로 묻혀버린 것은 야구 팬들에게도, 백인천 본인에게도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 야구의 선구자, 프로정신의 화신

    백인천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뛰어난 기록에만 있지 않다. 일본에서 경험한 프로야구의 개념을 당시 아마추어 연장선상 수준에 있던 한국 선수와 구단, 팬들에게 전하며 진정한 프로가 무엇인지를 몸소 선보인 선구자였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1982년 당시 한국 프로야구는 출범 원년으로, 많은 선수들이 여전히 실업야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백인천은 일본에서 20년간 체득한 프로로서의 훈련법, 경기 운영, 멘탈 관리 등을 전파하며 한국 야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경동고 시절부터 보여준 그의 승부 근성과 야구에 대한 열정은 일본에서 더욱 갈고닦아졌고, 한국 프로야구 원년에 꽃을 피웠다.

    2019년 KBO는 한국 유일의 4할 타자이자 선구자적 역할을 한 백인천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비록 말년에 건강이 좋지 않고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가 한국 야구에 남긴 발자취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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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인천은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역대 유일의 4할 타자라는 불멸의 기록은 4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경신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뛰어난 타격 성적에만 있지 않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20년간 활약하며 한국인 최초로 타격왕을 차지한 선구자, 프로야구 원년에 만 39세의 나이로 압도적인 기량을 과시하며 한국 야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교육자, 그리고 LG 최초의 우승과 이승엽 발굴이라는 지도자로서의 업적까지, 백인천의 야구 인생은 한국 프로야구 역사 그 자체였다.

    물론 롯데 감독 시절의 오점과 말년의 불운한 개인사는 그의 평가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60년이 넘는 야구 인생 동안 선수로, 지도자로, 그리고 해설자로 활동하며 한국 야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다. 특히 프로야구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1982년에 진정한 프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은, 기록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한국 프로야구 레전드 40인 중 24위. 어쩌면 이 순위는 백인천의 실제 영향력에 비해 낮게 평가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남긴 타율 0.412라는 숫자와, 한국 야구에 프로정신을 심어준 그 정신은 순위로 매길 수 없는 영원한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20대부터 50대까지 세대를 넘어 모든 야구 팬들이 기억해야 할 이름, 백인천. 그는 전설의 타격왕이자, 한국 프로야구의 진정한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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